생성과 소멸, 그리고 반복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집은 계속 더러워지는 중이다. 바닥과 가구 위에 먼지가 사뿐히 내려앉아 그것을 닦거나 털어주어야 한다. 사람 몸도 마찬가지다. 손톱과 머리카락은 계속 길어지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것을 잘라내어 깔끔하게 한다. 베란다에서 키우는 다육식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적당한 물과, 바람과, 햇빛을 맞으며 잎이 추가되었다가 또 그 균형이 깨어질 때는 잎사귀를 떨어뜨린다. 생성과 소멸의 사이클의 반복은 시간을 축으로 삼은 삶의 본질적인 부분에 다름 아니다. 무언가는 새롭게 만들어지고, 또 무언가는 버려진다. 손에 새로운 것을 쥐기 위해 원래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놓아야하는 것처럼, 무언가가 만들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버려야하는 것이 어쩌면 필수적일는지도 모른다. 노은주는 이러한 삶의 가장 단순한 진리,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어가는 과정을 캔버스에 옮긴다.
재건축, 도시, 위태로운 순간들
2011년부터 현재까지 7년여의 시간동안 노은주의 이어져 오는 관심사는 도시 내의 건축적 환경에 관한 것이다. 표현방식이나 소재의 선택에서의 변화는 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초기작 ‘허공에 선긋기’(2011)에서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금세 무너져버릴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는 얇은 나무의 형상을 마주하게 된다. 부서진 집의 흔적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됐다. 폐허의 한 가운데, 나무 막대기로 얼기설기 쌓아 만든 형태는 덧없이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아쉬움, 혹은 불안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듯 보인다. ‘Leaning against’(2013)에서는 외부의 맥락이 제거되었지만, 일시적이고 불안한 감정적인 지점이 잘 전달된다. 두께감이 있는 흰 종이는 벽에 기대어져 휘어 있고, 그 위에 얇은 목재가 비스듬히 놓여있다. 바람이라도 불면 이 연약하고, 불안정하고, 언제 그 균형이 깨어져 무너져버릴지 알 수 없으리만치 아슬아슬해 보인다. 그러나 이 재료들은 역설적이게도 화면 안에서만은 매우 침착하고 견고하게 머무른다. 찰나의 움직임을 화면 안에 영원히 붙들어 놓고 싶었던 것 같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문화적 예술적 향기가 남아있던 멋진 거리들이 대기업 프랜차이즈로 매년 변경되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 요즘 같은 시대에, 노은주가 그려내는 폐허 안의 연약한 오브제들은 어쩌면 열악한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작업을 지속하는 젊은 예술가를 은유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상황을 주변 건축물에 대입했던 것일까, 작가는 오래되고 낡은 것은 깨끗한 새것으로 금방 대체되는 도시의 면면을 확인하면서, 폐허에 끌림을 느꼈던 것 같다. ‘도시 정물’(2015) 연작에서는 그가 거주하는 지역 어딘가에서 가져 온, 버려진 오브제를 흰 바탕의 화면 위에 덩그러니 배치한다. 화면 안을 채우는 오브제는 기존 맥락이 완전히 지워진 상태로 제시된다. 관객은 아무런 정황 설명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오브제를 선입견 없는 눈으로 독대하게 되며, 대상을 완전히 새롭게 인지하고 상상할 수 있게 된다. 공사 현장의 자재를 덮기 위해 쓰였을 것 같은 검정색 타포린 천막은 언뜻 박물관에서 볼 수 있을법한 플라스틱 산 모형처럼 분하기도 했고, 스티로폼을 관통한 얇은 나무 봉은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는 창과 모든 창을 막을 수 있는 방패를 연상시키며 화면 안에 부유한다. 노은주의 시각 언어는 조금씩 추상화되며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끊어진 형태로 변모한다.
‘깨어진 그릇 그림’(2015)은 수십 조각으로 깨어진 유리그릇을 접착제로 얼기설기 붙여서 ‘재건축’해놓은 오브제를 담는다. 깨어졌기 때문에 그릇의 제 기능을 잃어 손쉽게 버릴 수 있었을 이 그릇을, 다시 붙여서, 그렸다. 그렇다고 원래의 형태가 완벽하게 복원된 것도 아니어서 원 기능을 다시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쉽게 버려지고, 다른 것으로 대체되고, 그것을 잊어가는 과정을 작가는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일까? 노은주는 도시 곳곳에서 그러모은 버려진 자재들과 함께 작가가 직접 종이로 만든 구조물을 그리기도 했다. ‘풍경1’(2015)이 그 예다. 버려진 듯 보이는 아이소핑크와 나뭇가지들과 같이 버려진 것, 쓸모없는 것, 연약한 성질을 가진 오브제를 적갈색 책상 위에 모아뒀다. 누구도 다시 필요로 하지 않을 것 같은 이 오브제들은 한 자리에 모여 새로운 화음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현대판 정물화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당대의 부와 여유 있는 삶을 과시하고자 그려졌던 17세기 정물화와는 달리, 외롭고 쓸쓸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나를 잊지 말라”고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종이로 만든 건물들, 불타다.
노은주가 회화적 화면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의 과정을 아는 것은 흥미롭다. 그는 가장 먼저 종이나 기타 재료를 가지고 어떤 형태를 직접 만들고, 그것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캔버스에 옮긴다. 무엇보다 종이로 직접 만든 오브제가 회화의 주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넘어서서 그릴 대상도 직접 창조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처럼 보인다. 노은주가 종이로 만든 오브제는 주로 직육면체나 원뿔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이다. 직육면체의 오브제는 도시 내의 아파트를 연상시키는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상징에서 자유로운, 작가가 조형해 낸 물성 그 자체로 다가온다.
‘풍경-밤’(2015)과 ‘풍경-낮’(2015)에서는 종이로 만든 직육면체 오브제들을 선반 위에 쌓아둔 연극적인 장면을 연출하여 보여준다. 직육면체 오브제는 아파트를, 나무로 만든 선반은 아파트가 서 있는 지반을, 뒤에 흰색과 검정색의 천은 낮과 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아파트가 빼곡하게 서있는 서울의 일상적인 도시 풍경을, 작업실에서 자신이 만든 인공적인 오브제들로 재구성해낸 것이다. 작가 자신이 조물주인 유사-세상에서 연극적인 상황을 만든다. 그것이 실제가 아닌 연극임을 알려주는 장치는 다른 색으로 만들어진 아파트들이다. 밤이라고 흰 건물이 검어지거나, 낮이라도 검은 건물이 흰색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Burned’(2017)는 자신이 만들어 낸 종이 오브제가 불타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작가는 자신이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공간 내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모형을 태우는 실험을 했다. 종이 모형은 불을 붙이는 즉시 애처롭게 타들어 갔고,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창조와 소멸의 전 과정을 멈춰져있는 회화적 화면에서 보여주기 위해, 노은주는 종이 오브제가 타들어가는 과정을 여섯 폭의 캔버스에 나누어서 마치 모션 픽쳐를 보는 것과 같이 그렸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 보면, 공사 중인 지역을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다. 지하철, 중앙차선 버스정류장 공사도 있지만 대부분 재개발 예정인 아파트 건축이다. 우리는 눈으로 직접 보거나, 몸으로 직접 체험할 때 강렬한 인지적 경험을 하지만,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간접 경험이 일반화된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회화 작품은 다른 차원의 역할을 수행해야할지도 모른다. 노은주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은유적 상징들을 통해 관객은 생성과 소멸, 그리고 그것이 무한히 반복되는 과정을 유추할 수 있게 되고, 삶에 관해, 버려지는 것에 관해 다시 한 번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글. 최정윤 (독립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