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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 닮았네?”[1]


납작한 덩어리, 무게감 있는 동그라미, 납작한 네모, 규칙 없이 찌그러진 선, 스스로 서 있는 것, 어느새 부수어져 버린 것. 돌과 닮았네?나뭇가지 같이 생겼어.” 도시 풍경 속에서 노은주 작가의 눈을 잡아끄는 것은 쓰임이 다하고 버려진 사물 혹은 기능이 없거나 소거된 물체의 형태이다. ‘길고 뭉툭한’ 돌의 모양, ‘쭉정이 같은’ 부러진 나뭇가지의 라인, ‘납작하게 접혀있는’ 건축물 파사드와 같은 것들. 이 표피만 남은 사물에 눈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Walking—Aside»를 설명하는 첫 번째 방법으로 노은주가 그리는 형상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을 해야 할 것 같다.


언뜻 풍경화 같고 잘 보면 정물화 같기도 한, 평면에 온전히 올라앉아 있는 그것은 분명 회화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조각적이다. ‘연극적이다’의 반대말이 ‘자연스럽다’라고 한다면, 실재할 수 없는 스케일의 사물이 빚어내는 이 상황은 다소 연극적인게 맞다. 노은주의 작업은 전통적 매체가 그러하듯 관조의 대상으로 머물며 응시의 순간 시작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촉각적이고 표면 너머의 상황을 표지한다. ‘이게 뭐지?’라고 묻는다면 매끄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 그림 속 상황(index)은 불가해성을 드러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긴장감을 갖게 한다. 그는 매끄럽고도 얇디얇게, 어찌 보면 회화가 부릴 수 있는 마티에르의 맛을 배제한 채 오직 재현에 충실한 정공법으로 밀도 높고도 불가능한 풍경을 가장 중성적인(neutral) 회색 조로 그려낸다.


눈을 잡아끄는 형태에 대한 관심은 그림 작업으로 본격적으로 이행되기 전 일종의 프리 프로덕션(Pre Production) 과정을 거친다. 형상을 드로잉하고 이를 3D 모델링 한 이후 작은 조각 모형으로 실현해 공간에 미니어처 시뮬레이션을 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붓을 든다. 2D와 3D를 오가며 스케일을 조정하고 균형을 맞추는 과정은 다소 정교함이 필요한 작업이면서 동시에 중력과 무게 그리고 바람 등 우연의 개입을 허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프리 프로덕션의 제1의 목적이 실재를 오롯이 구현하는 데 있지 않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순간이다. 외려 더 나아가 사물의 온당한 크기와 익숙한 원근법을 비틀고 형태를 다운그레이드해 버려 적확한 계산법으로 구축된 도면 속 그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는/않는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 오로지 그림 속 혹은 무대 위에서나 가능한 풍경이라 하겠다.


“꼭 그림자극 같네요.”


작가에게 작업이란 감각과 사고를 물질화, 가시화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노은주는 직선으로 갈 수도 있는 길을 여러 길을 경유해(Walking) 돌아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비롯된, ‘현상/상황 개입’을 에둘러 거치는 셈인데, 공학적 툴로 구축하고 조각적 방식으로 모형화한 뒤 마침내 가장 감각적인 매체인 붓을 들고 감정을 소거해 내며 화면을 구성한 그곳에 남은 것은 형상의 외피이고 이는 곧 작가가 느껴온 감정에 대한 유비로 이어진다. 이는 신속히 변화하는 작가를 둘러싼 상황을 보며 느꼈던 곤란함, 종종 신체적 불안 혹은 긴장과 애도라는 단어로 서술되어버리고 말았던 상황을 에둘러 (그러나 가장 가깝게 하게) 표현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어디에 발 디뎌야 할지 모를 회색 감정은 도시 사물과 풍경을 보는 시야에 투영되고, 이를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작가가 선택한 것은 최대한 많은 감정을 덜어내는 그리기였다.


그렇게 노은주는 대체로 아름다움보다는 크기가 주는 압도감에 시선을 붙잡혀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대상과 버려지고 유리된 사물—입주하기 직전의 아파트, 공사 부자재, 꺾인 나뭇가지, 부러진 연필심까지—을 한데 모아 스케일 장난을 치며 세계를 재현해 나간다. 도시를 부감으로 바라보았을 때 성냥갑처럼 보이는 건축물 같은, 꼭 그만큼의 너비가 작가가 꾸리는 무대이자 화면이 담지하는 깊이이고 그 무대 속 주인공은 녹고 부러져 사라져갔을 도시 정물들이다. 꼭 그림자극 같다. 그리고 그것이 이번 전시에서 노은주 작가가 보여주는 두 면의 세계이자 무대 위 방백(Aside)이다.


“주체를 빛나게 하기 위한 두 번째 선택”


회화는 무한한 깊이를 가진 환영 공간에서 캔버스의 즉물적 표면을 거쳐 실제 공간과 영향을 주고받는 형태로 확장되어 왔다. 이제 더이상 그림은 평면으로만 인식되지 않으며 전시 역시 이미지만을 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간 속 연출된 상황과 기술적, 물리적 경험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번 전시는 회화의 확장에 대한 모색으로써 회화를 물리적 공간으로 끄집어내기보단 평면 안으로 끌어들이기를 시도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보이는 일정한 높이의 화면을 창(Window)으로 본다면, 이는 너머의 세계를 관찰하는 창구의 역할을 한다. 그림 속 배경은 아니지만 그에 가까운 기능을 하는, 주인공과 적절히 분리되며 “주체가 빛나게 하기 위한 두 번째 선택”으로써 그려진 바닥과 벽은 ‘얕은 깊이’라는 환영을 획득하게 하면서도, 공간보다는 사물(주인공)이 돋보이게 하는 무대와 같이 기능한다. 사람의 몸집만큼 커진 돌의 셰이프, 발치에 닿을 만큼 작아진 건물의 형(形)을 한 어떤 미메시스는 화면 위에 오롯이 배치되는 한편 이곳과 저곳을 넘나들길 시도한다. 이번 전시에서 참조된 삼면화, 사면화 형식은 캔버스라는 고정된 틀의 확장의 개념으로 읽히는가 하면 동적인 회화를 암시하는 장치로 매개한다. 연작이면서 동시에 독립적 개체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앞으로 다섯 걸음 다가갈수록 거대해지고 돌아서면 마주치는 사물로 하여금 관객에게 일종의 긴장과 균형을 조율하는 경험을 제시한다. «Walking—Aside»는 당연한 신(Scene) 사이 명백히 존재해온 유리된 사물을 전면에 드러낸다. 이것은 부지불식간에 사라지고 또 불현듯 등장한 도시 풍경이자 노은주가 그려온 사물 회화의 집체극(Collective-drama)이다.


글 신지현 (전시기획)


[1]. 전시와 작업에 대한 설명을 대신하는 이 글의 소제목은 기획자가 작가와 나눈 대화 중 발췌,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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