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은주 에게
유난히 높고 깊은 천장 아래 긴 계단을 내려오면 짙은 회색 문이 반쯤 열려 있다. 그 회색 문 뒤로는 더 짙은 회색의 검은 천이 비좁게 펼쳐진다. 열린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가기에는 내가 서 있는 여기와 검은 천이 펼쳐진 저기를 가르는 복도의 빛이 어딘지 서늘하다. 비가 내리던 그날. 소란스럽게 모두를 환대하던 술렁거림이 어쩐지 주인공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텅 빈 공론의 장을 떠오르게 한다.
2017년 노은주와 나는 이 높고 깊은 천장을 사이에 두고 1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했다. 지나간 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보이지 않았을 생각들을 추슬러 본다. 그리고 이게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려오는 긴 층계에서 마주해야 했던 짙은 회색 문 뒤의 이상한 장면들이 2019년 윌링앤딜링의 흰 벽을 사이에 두고 연속으로 펼쳐졌다. 2년전보다는 조금 더 밝은 회색 톤으로 조금 더 정돈된 형태로 세 개씩 혹은 네 개씩 박자를 이어가는 장면들 속에 면의 구멍과 접힌 면들, 구불구불한 선들과 덩어리들이 (깊이와 무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 얹혀 있었다. 혹은 포개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2년전과 마찬가지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이 아닌 그 문 밖에 서 있는 듯한 공간의 착시를 느껴야만 했는데. 내가 보고 있는 저기를 풍경의 거리를 가진 정물이라고 해야 할까 혹은 정물의 관계를 가진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거리와 관계는 서로의 무엇도 보충하고 증명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한 공간에서 공모해오지 않았던가?
2019년 12월 윌링앤딜링의 전시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노은주는 그림자 놀이를 했다고 수줍게 웃으면서 말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가 본 것에 대해 질문했다. 어쩌면 노은주는 사물의 환영을 그리고 있었던 걸까? 보았기에 보이지 않는 것을 혹은 보지 않았기에 볼 수 있는 것을. 노은주의 수줍은 그림자 놀이와 내 생각 언저리에 맴도는 환영이라는 단어 사이의 가느다란 끈을 이어가며 다시 찾은 아티스트 토크에서 노은주는 이번 전시의 제목인 걷기(walking)와 방백(aside)을 따로 구별해서 – (hyphen)으로 연결했다. 어쩌면 그림자와 환영 또한 걷기와 방백처럼 그렇게 따로 구별해서 – 으로 연결해볼 만한 미지의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아. 또 다른 보이지 않는 끈이 그려졌다.
노은주가 만들어낸 장면 속에 사물들은 일관되지 않은 빛을 받고 있었기에 그 그림자의 출처를 알 수 없었고 게다가 그림자가 없는 사물들은 그 입체감마저 의심받아야 하는 지경이다. 중력이라는 것이 있다면 내가 딛고 있는 바닥이 아닌 내가 바라보고 있는 벽 뒤에 있을 것만 같았고 빛이라는 것이 있다면 사물의 밖이 아닌 그 안에 품고 있을 것만 같았다. 르네상스 회화에서 환영 (Illusion)은 감각의 왜곡을. 아나모르포시스 (Anamorphosise)는 공간의 왜곡을 통한 착시를 말한다. 오늘날에도 회화의 시각적 경험은 단순히 본다는 행위에 머무르지 않는다. 본다는 감각은 몸의 다른 감각들과 연결된다. 공간뿐만 아니라 지능과 감정에까지 몸의 총체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저것을 이것으로 본다. 혹은 이것을 저것으로 본다. 노은주가 고집스럽게 질문하고 있는 본다는 행위가 내포하고 있는 시공간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명과 환경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노은주는 왜 시각적 경험의 장을 2차원의 평면에서 3차원으로 다시 3차원에서 2차원으로 전유하며 거기에서 어떠한 사유의 과정을 전개하고 있는 걸까?
프랑스 철학자 르페브르(Henru Lefevre, 1901~1991)는 본 것과 보는 것을 구별하는데, 본 것은 ‘재현된 공간’이고 보는 것은 ‘스스로를 재현하려는 공간’이라고 구분한다. 우리는 사회가 측정하고 구성한 공간에 머무르지만 그 공간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경험하면서 다시 소유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감각은 우리가 체험하는 공간과 인지하는 공간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소외되며 이 소외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한 공간을 (애써) 지각하게 되는 것이다. 노은주가 연출한 공간은 도시가 사물에 부여한 의미 기호를 재현하고 있는 ‘재현된 공간’이 아닌 도시에 살고 있는 노은주가 감각하는 기호들을 구별해서 사물로 재구성하는 ‘스스로를 재현하려는 공간’이다. 2년전과 마찬가지로 < Walking-Aside >에서 내가 겪어야 했던 공간의 착시는 이러한 ‘재현하는’ 사물이 ‘재현된’ 공간에 연속적으로 얹혀지고 포개어 있을 때 만들어지는 거리와 관계의 비틀림에서 오는 것이리라. 나는 내가 본 것과 보는 것의 오차 범위를 (헛되이) 좁혀본다. 하나의 통합된 공간을 그 온전한 삶의 지점을 찾아서. 그러나 그 오차에서 발생하는 모순이 점점 더 추상화되고 있음에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하나의 감각에 의지할 수 없음에. 나는 다시금 노은주의 제목이 그리하듯 하나의 – 혹은 무수한 – 으로 이어 나간다. 더 이상 하나의 감각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 다른 보이지 않는 끈을 그려본다. 우리는 걷기 – 방백 – 그림자 – 환영 – 공간 – 장소 – 재현 – 사유 - 기억, 그리고 이 모두를 다시 섞어서 구별하고 다시 이어 구분하면서 그 사이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통합하기를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은주가 지난 몇 년간 도시를 구성하는 사물의 형태에 대한 질문을 해왔다면, <Walking-Aside>는 그 형태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도시를 감각하는지, 그 사물들과 우리 삶의 관계를 사유하게 한다. 르페브르는 이러한 지각된 공간을 ‘공간적 실천’이라고 하며 이러한 소외를 통해서 “벌거벗겨져 그 자신의 바깥으로 내쫓긴 인간”이 비로소 철학적 사고를 가지고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생각의 끝에 떠오른 또 다른 기억은 짙은 회색 문 뒤 노은주의 책장에 이 프랑스 철학자의 책 <공간의 생산>이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 조만간 노은주와 함께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봐야겠다.
배은아 드림
글 배은아 (독립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