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폴리아에 관한 명상


spolium 중성명사 1. (동물의 사체에서 벗겨낸) 살갗, 가죽, 양털가죽 등. 2. 패배한 적의 시체에서 취한 무기, 장비 등, 전쟁 노획물 일반, 전리품. 3. 폭력, 약탈 등으로 획득한 아무것. 4. 범죄자를 처형할 때 벗긴 옷.[1]
『옥스포드 라틴어 사전』

이렇게 해서 아테네인들은 그토록 짧은 기간에 방벽을 세웠는데, 오늘날에도 그 구조물이 서둘러 축조되었다는 게 잘 보인다. 방벽의 낮은 부분 가로층에는 온갖 돌덩이를 쌓았는데, 어떤 것들은 아귀를 맞춰 다듬지도 않은 채 그저 일꾼들이 주워온 것 그대로이고, 기둥 상당수는 무덤 비석이나 다른 용도로 재단한 석재를 가져와 지었기 때문이다.[2]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93.


노은주의 작업은 시각예술 감상자에게 지극히 근본적인 질문을 야기한다. 내가 지금 여기서 보는 것은 무엇인가. 조금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그림들에서 무엇을 알아보는가. 알아봄은 감상자가 외부 세계의 물상에 대해 이미 소유한 정보를 재확인하는 과정이다. 아는 것을 알아봄으로써 우리는 안도하고 쾌락을 느낀다. 그러나 어떤 대상의 재현 앞에서 과연 무엇을 알아보는지 자문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대상과 재현의 방식이 감상자가 자신하는 지식을 불확실성의 힘으로 파쇄하며 뒤흔들고 있다는 징후이다. 이처럼 망연하고 불안하게 하는 예술의 덕으로 우리는 세계를 이전과 다르게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새로 생겨난 감식안으로 작품을 다시 한번 더 본다. 마침내 알아볼 수 있게 된 것들 외에 여전히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잔존할 것이다. 회화는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이 생성하며 잔존하는 장소가 되었다.


기획자 신지현과 함께 노은주 개인전을 보러 가는 도중에 나는 개략적인 전시 정보를 얻었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 도착해서는 기획자의 해설문을 읽으면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들었으며, 작가를 현장에서 만나 이전의 작업들, 현재 작업과의 연계, 제작 방식 전반 이야기를 직접 묻고 듣는 호사를 누렸다. 캔버스에 재현된 물상들이 공사장에 버려진 건축 자재, 부러진 나뭇가지, 피복이 입혀진 전선, 유토 등이라는 사실은, 고독한 감상으로는 아마도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건만, 작가와 기획자가 말해준 덕분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전시 주체들과 공유한 언어는 자율적인 상상과 감상을 훼손하기는커녕 이미지의 기원, 생성, 배치, 기능에 대한 전문 지식을 제공하면서 작업과 전시의 이해를 심화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재현된 것들은 구체적 사물이라기보다는 수학적이고 추상적인 형상에 가깝다. 비정형으로 구부러진 선들과 역시나 비정형으로 절단된 면들이 캔버스라는 이차원 평면에 배열되었다. 어떤 면들은 주름지거나 접혀서 간신히 양감을 얻고, 그것들의 배후에는 희미하게 음영이 번지며, 가느다란 원통형 선들은 옅은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그럼으로써 이것들이 역시나 캔버스에 재현된 벽과 바닥의 삼차원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며 회화는 전통적으로 이차원에 삼차원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예술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선들과 면들이 추상이기 이전에 구상이며 그것의 지시물 상당수가 공사장의 폐기물이라는 정보는, 환영과 착시라는 회화의 주요 기능을 재고하게 할 뿐만 아니라, 노은주의 작업을 보다 장구한 미술사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데 있어서 유용한 단서가 된다. 특히 스폴리아(spolia) 개념이 노은주의 작업을 감상하는 데 유효해 보인다. 스폴리아의 어원은 라틴어 스폴리움(spolium)이다. 고대 로마는 무수한 영토 확장 전쟁들을 일으키며 건설한 제국이었고, 이런 맥락에서 스폴리움은 승자의 권력을 과시하는 전리품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과시적 노획물 중에는 패자의 시신에서 벗겨낸 무구도 있으므로, 말의 의미는 적과 죄인의 몸에서 벗겨낸 옷, 장비, 나아가 동물 사체에서 벗겨낸 털가죽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스폴리움은 폭력, 살해, 파손, 박리의 사건을 함의한다. 강건하고 온전한 전체가 아니라 부서진 것, 떨어져나온 것, 나뒹구는 것, 벗겨져 너덜거리는 것들의 이미지를 상상해야 한다. 잔혹한 폭력과 그것 이후의 세계상을 숙고해야 한다.


그러나 4세기경 제국이 쇠퇴 일로에 접어들면서, 유럽과 아시아에서 점차 발흥하는 신세력에 의해 로마 문명의 산물들도 파괴와 노획의 대상이 되었다. 중세의 기독교 권력자들은 특히 로마 시대 건축물의 기둥, 벽, 지붕에 쓰인 석재를 그대로 가져다 성당과 수도원을 지었다. 이처럼 본래 역사와 문화의 맥락에서 부분적으로 절단하여 정치적으로 재해석하고 실용적으로 재활용한 자재 파편을 스폴리아라 한다. 미술용어로서 스폴리아는 건축에서 비롯되었으나 현재는 보석, 귀금속, 도자기 등 원형을 파손하고 재가공해서 새것을 제작하는 공예의 영역에도 적용된다.[3]


스폴리아는 서구 고대와 중세라는 지정학적 역사적 맥락을 넘어 오늘날의 예술 창작 방식과 관련해서도 사유하고 실행할 여지가 풍부한 개념이다. 레디메이드, 콜라주, 아상블라주, 파운드 오브젝트... 이미 익숙한 지난 세기의 방식들이 결국 스폴리아의 현대적 실행 아닌가. 스폴리아는 아나크로니즘의 아카이브로서, 상이한 시간, 질료, 양식, 정치성, 노동과 생산 조건 등을 동시대의 새로운 이미지의 장 안에 배치하면서, 뜻밖의 어울림, 결코 합치되지 않을 것들의 긴장과 이질성, 트라우마의 회복에 대한 전망, 그러나 손상의 영원, 아물지 않은 날카로운 모서리, 그럼에도 그 틈에서 빛을 발하는 것들, 숨결처럼 새어나오는 바람 등을 감각하게 한다.


스티로폼, 석면 슬레이트, 알루미늄 판넬, 아크릴판, 섀시, 전선, 철사, 리놀륨... 공사장의 건축 자재라는 정보에 의거하여 겨우 알아보거나 짐작하게 되는 것들... 부서지고, 잘라지고, 깨지고, 버려져서, 노출되고, 나뒹구는 것들... 노은주의 캔버스에 재현된 사물들은 현대 한국적 풍경의 주요한 구성 요소다. 도처에 편재하며 시야에 침입하는 범상하고도 폭력적인 물상들이다. 철거, 재건축, 부동산 임대가 경제의 외설적 근간인 국가 영토에서, 건축물은 지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물어질 가망이 있고, 건물 내부는 임차인이 바뀌자마자 다 뜯어내 헐벗겨진다. 토목과 임대의 실권자들이 언제나 승리를 거머쥐는 현대 한국에서 건축은 스폴리움에 취약하다. 벽지, 장판, 간판, 조명기구, 전선... 시시때때로 잔혹하게 벗겨지는 주거의 살갗. 이런 장소에서는 삶의 지속가능성을 주장하기가 무력하다. 재생과 재활용은 무가치하게 평가절하된다. 이런 정황에서 노은주는 한국적 스폴리움을 채집하고, 표면을 깨끗하게 정돈하여, 회화의 평면에 주의 깊게 배치한다. 건축에서 실용적으로 재활용되지 않은 사물들로 회화적 스폴리아를 구성한다. 덧없는 시간성의 감각을 발생시킨다. 조금 더 연장되었을 수도 있는 어떤 생이 여기서 마감되었다는 데 애도를 표한다. 감상자는 그 고요한 예술적 행위에 동참한다. 촛불 대신 밝고 흰 전기 조명 아래 명상에 잠긴다.


관람 당일 작가와의 대화에서 감동받은 순간이 있다. 죽은 나뭇가지 여기저기에 붙은 미지의 하얀 질료가 너무나 부드럽고 폭신해보여 무엇인지 물었다. 작가의 대답 덕분에 유토라는 것을 처음 배웠다. 유토는 맨손으로 아무리 만져도 해가 없다고 한다. 작가는 해가 되지 않는 재료들로만 작업하고 싶다고 했다. 무해가 작가의 신체뿐만 아니라 세계에도 적용됨을 알겠다. 부서지고 버려진 기존의 것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첨가한 새 것. 감싸고, 붙이고, 잇고, 고치는, 말랑하고 부드러운 연고 같은 것. 스폴리움과 스폴리아를 위안하는 것. 노은주의 예술로 인해 그것을 알아보았다.

글. 윤경희 (문학평론)

[1] "spolium," Oxford Latin Dictionary, Oxford, Oxford UP, 2002, p. 1994에서 발췌.
[2] Thucydides,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I and II, trans. Charles Foster Smith, Cambridge, Harvard UP, 2003, p. 157.
[3] cf. Dale Kinney, "The Concept of Spolia," A Companion to Medieval Art, ed. Conrad Rudolph, Chichester, Wiley-Blackwell, 2010, pp. 23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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