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세우기수평적으로 열어 놓기
: 노은주 개인전 《Walking―Aside》



작가 노은주의 평면 작업을 볼 때, 아마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납작하다’ 혹은 ‘평평하다’라는 인상을 가질 것이다. 실제로 그의 그림은 평면인 지지체 위에 그려졌다는 면에서 평평하지만, 사물이 배경과 함께 여러 겹의 레이어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보면 납작하게 그려져 있다. 스케치업 한 구성을 실물로 만든 다음에 페인팅으로 옮기는 그의 작업을 보고 혹자는 일본인 페인터 치바 마사야(Chiba Masaya)의 작업과 유사하게 ‘사생(寫生)’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도 있다. 즉 어떤 장면을 포착하는 데 ‘재현 기술’을 통해서 대상이 그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노은주의 페인팅 역시, 장면을 똑같이 포착하는 측면에서 재현 기술의 결과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


이런 판단을 통해 그의 작업을 ‘사생’이나 ‘트롱프-뢰유(Trompe-l'œil)/눈속임 그림’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는 오해의 여지가 아주 큰 분석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은 재현 기술을 통해 환영의 공간이나 창문을 창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물감이 재현으로 나아가는 과정, 혹은 반대로 재현이 다시 물감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을 평면 위에 만든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장이라는 말은 만들어 놓은 세팅을 ‘(그리는) 소재’나 ‘주제’ 삼아 그리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그와 달리 그의 작업은 물감이나 붓질과 같은 페인팅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와 재현 대상, 나아가 그가 보고 그린 대상을 서로 수평적으로 이어 주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때 물감은 모사나 재현으로 전개될 뿐만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도 전개된다. 즉 재현된 대상들은 물감 덩어리로 된 형상으로 회귀하고 배경은 캔버스 평면으로 돌아온다. 이번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린 개인전 《Walking―Aside》에서 작가가 선보인 작업은 그의 이전 작업과 시도를 거쳐 나왔고 (앞서 말한) ‘장’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작품은 그의 이전 작업에서 진전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Walking―Aside》보다 이전에 열린 전시에서 작가가 선보인 작품을 살펴보자. 예를 들어, 지난 갤러리기체의 그룹전 《몰입과 균형》(2018)에서 소개된 〈조각들(Collected Pieces)〉(2017)은 물감이 어떻게 평면 위에서 재현 대상으로 변하는지, 그리고 다시 물감의 흩뿌림과 덩어리들로 용해되는지를 보여준다. 평면 위에서 대상을 (시각적으로) 닮은 물감과 물감으로 재현된 대상은 서로 왕래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 운동은 흘러내린 물감과 배경에 사용된 물감의 색깔이 (재현된) 대상 앞에 달라 붙음으로써 화면 안에 창출된 깊이감을 깨면서 우리의 시선을 ‘(캔버스) 평면’으로(써/을 향해) 막아선다. 그런 의미에서 ‘조각들’은 (유사 도시공간처럼 화면에 등장하는 〈풍경1〉, 〈풍경2〉, 〈풍경_낮〉이나 〈풍경_밤〉[1]에서 이어져 온 것처럼) 재현 대상이 된 오브제들의 집합이라는 의미에 머물지 않고, 재현 대상으로 나아가는 물감이나 붓질 또한 가리킨다. 물감과 붓질은 구체적인 형상을 이루지 않는 조각으로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 화면에서 덩어리가 되고 어떤 오브제의 재현이 된다.[2]



《몰입과 균형》에서 소개된 작업의 연장선 상에서,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업은 킵인터치에서 열린 《If Not, Not》 (2018)에서 실험적으로 보여준 〈Shadow Pieces〉(2018)과 그룹전 《세 번 접었다 펼친 모양》(2018, 브레가 아트 스페이스)의 출품작 〈The Grey Side_01〉와 〈The Grey Side_02〉(2018)의 특징 또한 짚어 보여준다. 전자는 대상들이 평면 위에서 수평화된 관계를, 후자는 장면의 연출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이미지가 평면을 통해, 깊이감을 통해, 그리고 물감을 통해 세워지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분석을 토대로 우리는 그의 작업이 단순히 눈속임 그림이나 사생 혹은 형태 모사라는 기술적 재현의 차원에 머물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그의 작업은 ‘세우기’를 통해서 재현과 표현이 평면 상에 수평적으로 놓이게 되는 상황을 포착한다.


먼저, 그의 작업에서 ‘세우기’란 대상을 세워서 어떤 장면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먼저 출발한다. 예를 들어 〈Leaning Against〉(2013)를 보면 비스듬하게 종이와 나무막대를 그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혹자는 이 작품에 ‘세우기’라는 단어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비스듬한 것과 〈The Grey Side_01〉처럼 똑 바로 수직으로 세워진 대상은 엄연히 따지면 각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의 작업을 분석할 때 ‘세우기’라는 표현을 쓰고 싶은 이유는, 바로 〈The White Flag〉(2013)와 〈녹는형태연습〉(2017) 그리고 이번 신작에 걸쳐, 작가가 그린 물건이 ‘현실 공간에서’[3] 세워졌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고, 재현 대상을 ‘화면에서’ 성립시키는 과정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The White Flag〉에서 얇은 천이, 그리고 〈녹는형태연습〉에서 녹아내리는 소재는 어떤 형태와 상을 ‘고정시켜 구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이미지를 세우고 있다. 여기서 대상은 ‘화면에’ 옮겨 그려질 뿐만 아니라 ‘화면에서’ 물감으로 이미지를 세우는 일로 곧바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물감은 재현 대상이 되는 과정을 화면 상에 포착하고 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이미지 세우기, 즉 이미지를 구축하고 형태적으로 성립시키기는 재현 대상과 물감을 ‘날것’[4]으로 받아들여 둘을 서로 수평적으로 연결한다. 〈The White Flag〉과 〈녹는형태연습〉을 보면, 대상은 구체적인 물건 혹은 그의 배치와 어떤 (구체적) 형상으로 변하는 과정을 중간에서 포착한다. 하얀 천은 하얀 물감과 천 사이를, 그리고 녹는 형태는 어떤 형태의 재현과 형태 자체로 화면에서 전개된다. 그가 페인팅에서 보여주는 것은 ‘무엇을 닮은/무엇에서 나온’ 관계보다 ‘무엇과 유사한’ 관계이다.[5]



어떤 상을 형태적으로 구축하고 성립시키는 세우기의 방법은 〈The Grey Side_01〉와 〈The Grey Side_02〉에서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비스듬하지 않고 수직으로 형태들이 구축되었다는 점뿐만이 아니라, 개별 형태나 상보다 지지체인 캔버스의 면을 세우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말은 구부러진 면들이 가느다란 선에 의해 세로로 지탱되어 있다는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배경 앞의 있는 사물에서 지지체에 기록된 형상으로 보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구부러진 회색 면들은 어떤 구체적 대상의 재현으로 인식되었다가 배경에 깊이감이 더해진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캔버스라는 또다른 구체적인 대상을 메타적으로 포착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구부러진 대상의 재현과 그것이 그려진 ‘캔버스의’ 재현을 사이에 두고, 가느다란 막대는 이전 작업에서 이어지는 물리적 방법과 다른 태도로 이미지를 세운다. 화면에서 막대는 재현인 동시에 붓으로 그린 선이며, 〈The White Flag〉나 〈Nowhere〉처럼 어떤 대상을 받쳐주는 역할에 머물지 않고 형상과 재현, 그리고 재현의 재현 사이를 위계적으로 고정하지 않고 수평적으로 열어 놓는다. 그런 점에서 구부러진 형상들은 평평한 네모/평평한 재현 대상과 캔버스가 평면적으로 통합되지 않고, 오히려 재현 대상―공간의 재현과 형태 자체―색채 사이를 캔버스 상에 ‘이음새’처럼 작용한다.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는 이 이음새를 구부러진 배경과 재현 대상들을 ‘통해서’,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꿰매고’ 보여준다. 캔버스 사이가 떨어져 있는데 착시효과처럼 이어지는 듯 보인다는 인식에 머물지 않고, 이전 작업에서 선보인 ‘유사’의 관계, 재현과 형상 사이의 왕래를 출품작에서 보여준다. 〈Center left―낮은 벽과 돌〉, 〈Center―낮은 벽과 돌〉과 〈Center right―낮은 벽과 돌〉에서 우리는 그림자와 대상 자체는 물론 나뭇결까지 붓질에서 재현 대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인식한다. 한편 납작하게 그려진 배경은 환영적 공간감을 밀어내면서, 아니 오히려 캔버스 면과 일체화 하여 면 자체가 되고 나서 앞에 놓인 대상의 재현을 통해 다시, 그러나 다른 배경이 된다. 말하자면 구부러진 선―대상을 통해서 캔버스를 메타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이 선―대상은 그림자의 재현과 대상 자체의 재현을 수평적으로 이어 줄 뿐만 아니라, 납작하게 그려진 배경과 그 앞에 있는 양감 있는 대상 또한 꿰매는 역할을 하고  있다.[6] 때문에 그의 작업은 아무리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할지라도, 기록된 대상과 그림자의 관계가 전자에서 후자가 생겨나는 위계적 종속 관계를 붓질과 그것이 재현하는 대상을 통해 수평적으로 열어 놓는다.


다시 처음의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사생’이나 ‘트롱프-뢰유/눈속임 그림’이라는 판단은 그림의 재현적인 성격을 결과물로 보여준다면, 노은주의 작업은 어느 부분에서 이 재현을 깨는 논리를 적용하면서 재현에서 물러서게 한다.  그런데 이는 재현을 거부하여 추상을 그린다는 의미와 다르다. 오히려 그의 작업은 추상 자체보다는 페인팅에서 재현과 추상으로 서로 이행하는 관계로 나란히 보여준다.[7] 예를 들어 어떤 경우에는 흘러내리는―아직까지는 어떤 것이라 말하기 어려운―물감과 같은 색깔로 재현된 대상을, 재현 대상과 그림자를, 그리고 평면성과 깊이감을 나란히 놓고 재현에서 재현 이전으로, 그리고 재현 이전에서 재현으로 왕복적으로 침투하는 관계를 화면 안에서 보여준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그의 작업은 이미지를 세우는 것과 수평적으로 열어 놓는 것의 관계 또한 수평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 봤듯이 이미지를 세우는 태도는 그리는 재현 대상을 구축할 뿐만 아니라 날것을 어떤 것과 같이/함께 놓음으로써 실현된다. 즉 세워지지 않은 것을 일으켜 주고 또 아직 세워지지 않은 것을 함께 보여주는 운동, 이것이 전개되는 장으로 노은주의 페인팅을 이해할 수 있다. 삼부작처럼 구성되고 배치된 〈Center left―낮은 벽과 돌〉과 〈Center right―낮은 벽과 돌〉 양쪽에서 사각형 기둥처럼 보이는 대상은 〈Center left―낮은 벽과 돌〉(세 작업 모두 2019년 제작)에서 캔버스 사이를 시선으로 이어줄 뿐만 아니라 재현된 부피가 면이 되는 변화 또한 이어 준다. 더 나아가 양쪽에 등장한 사각형 기둥이 중앙에 위치한 캔버스를 거쳐, 사실 얇은 면을 구부린 것으로 (다시) 이해하게 된다. 이런 인식의 변화는 바닥인 나무판의 재현을 회색 면과 연결해주는 선―대상을 통해 공간의 깊이감을 뒤로 창출하기도 하고 또 평면에 밀착시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 작품에서 ‘구부러진’ 선과 면의 표현은 프로트타입처럼 제작된 〈회색면〉(2018)에서 확인 가능하듯이 얇은 면과 세워진 볼륨을, 그리고 평면성과 깊이감을 모두 ‘이어 주고 있다’.



글. 콘노 유키


[1] 모두 2015년 작품.
[2] 필자가 쓴 「회화다운 회화」 http://interlab.kr/archives/4064 (2018, 2020년 1월 24일 최종접속)을 함께 참조
[3] 여기서 현실 공간이란 그리기 위해 배치된 작업실 공간뿐만 아니라 〈The Grey Side_01〉 작품처럼 소프트웨어 상의 공간 또한 가리킨다.
[4] 날것은 어떤 구체적인 이름(책, 꽃병 등등)이 부여된 물건과 달리, 작가가 장면을 구성하는 오브제들을 일차적으로 가리킨다. 이는 더 나아가 구체적이지 않은 형상뿐만 아니라 재현과 형상 사이를 오가는 과정으로 페인팅에 등장한다. 따라서 날것은 날것에 ‘가까운’ 어떤 대상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요컨대 그것은 구체적인 대상에서 형상으로, 그리고 그 반대방향으로 ‘다가가는’ 중간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날것과 날것에 가까운 것을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이되, 본문에는 날것으로 통일하여 표기하였다.
[5] 노은주의 이번 개인전에서 신지현 기획자가 쓴 글을 읽으면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어볼 수 있다. “돌과 닮았네?”(강조는 필자에 의함). 여기서 기획자는 무의식적으로 “을 닮은”이라는 표현 대신에 ‘과’라고 적었겠지만, 위 맥락에서 이 문장은 상당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말하자면 “돌을 닮은”이 아니라 “돌과 닮은”이라고 할 때, 대상과 그 재현의 관계는 후자가 전자에 종속되는 위계 관계, 즉 닮음의 관계가 아니라 유사 혹은 상관의 관계로 진입한다. 돌은 그 자체가 이미 구체적인 대상보다는 추상적인 대상이며, ‘돌을 닮은 것’이 곧 ‘돌’과 ‘닮은 것’의 수평적 관계로 성립된다. 이 경우 돌이 현실 공간(각주 3번 참고)에 없는데도 물감의 덩어리가 돌로 인식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날것인 ‘돌’과 ‘닮은 것’의 양자는 화면 바깥(에 있는 대상)과 화면 내부(에 있는 재현 대상)를 물감-재현의 추상성으로 연결시켜 준다.
[6] 선―대상은 2017년과 2019년에 제작된 〈검은 선〉에서 영어 제목인 ‘Flexible Things’와 함께 드러난다. 즉 검은 선이란 현실공간에 있는 가늘고 구부러진 대상이자 동시에 붓질의 결과인 선이다. 두 작업에서 선―대상은 액자를 메타적으로 포착한 재현과 배경, 그리고 배경 앞에 놓인 재현된 대상을 이어준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Center―그림자 형태 01〉의 중앙, 바로 하얀 색 판 밑에서 배경으로 침입하는 선-대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선-대상은 물감 붓질과 재현 사이를, (재현) 대상과 그림자의 관계를, 그리고 그림자의 깊이감과 재현된 나무판의 납작함을 꿰매고 있다. 이 방식을 통해서 전자와 후자의 관계는 캔버스 평면을 통해서 서로 왕복하는 수평적 관계로 성립된다.
[7] 덧붙여 말하자면, 여기서 추상이란 어떤 핵심적 요소로 추출된 (abstracted)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대상이 다른 이미지와 나란히 놓이게 되는 ‘날것’이다. 예를 들어 면은 배경과 메타적으로 포착된 캔버스와, 구부러진 면은 어떤 건축물과, 그리고 선과 대상은 ‘같이/함께’ 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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