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노은주는 물리적인 공간의 해석을 지지체의 형태에 투사하여 캔버스를 변주해 왔다. 오랜만에 열린 이번 개인전에서처럼 화면을 여러 개로 분할한 건 처음인데, 이 점에 집중해서 회화를 읽는 시도가 그의 의도를 곡해하지 않는 선에서, 일종의 진자운동을 발생시킨다고 느꼈다. 적당한 오해와 발견 사이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작가가 이끄는 곳으로 천천히 근육을 쓰게 하는 장치로 작동한다고 말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오래된 시각적 익숙함과 먼저 만나게 된다. 나란히 걸린 네 개의 패널 중 양쪽 날개에 해당하는 것들은 중앙패널 너비의 절반 정도 돼 보인다. 삼면화와 사면화 모두 서로 간에 유기성이 발견되지만, 약간의 엇박자를 놓고 있어 개별적인 호흡 또한 갖고 있다. 화면 안을 보자. 바닥이 다져지고, 벽이 세워져 있어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된다.  시선을 붙잡는 물체가 그 중심에 놓여 있는 것까지 보자면 (반)종교화에서 주로 쓰는 다면화의 형식 구조를 꽤나 여럿 취한 것 같지만, 노은주의 공간에는 아기 예수도 뒤틀린 신체도 없다. <긴 형태 01>(2019), <낮은 벽과 돌>(2019) 등의 제목이 지시하듯 그저 형태일 뿐이거나 벽과 돌처럼 의미작용 내지는 의미 자체로부터 덤덤하게 이탈한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가는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여러 면과 선, 덩어리에 줄곧 관심을 가져왔다. 이들은 도시의 근간이 되는 모든 것에 속하면서도 아직은 무엇이라 이름 붙지 않은, 혹은 한때 품었을 이름이 이제는 떨어져 나가버린 상황에서 수집된 것들이다. 작가는 이들을 빠르게 모델링하고 공간에 재배치한 뒤 화면에 옮기는데, 그렇게 결정된 대상들은 최종적으로 한쪽 면만을 노출하고 있다. 작가의 신체가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크기와 질감으로 전환된 사물들이 사방에서 관찰이 가능한 이상적인 공간에 재배열되었다가 종국에 하나의 시점(대부분 정면을 응시한다)으로 수렴되었다는 점은 다시 서구 전통회화 양식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공간의 깊이가 얕고, 대상들이 얇게 재현되었으며, 그 한계를 도리어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기에 작가의 태도가 계승이나 재해석에 있지 않음은 금방 확인된다. 오히려 이들 면과 선과 덩어리 사이의 살짝 벌어진 간격이 눈에 들어오면서 다소간의 긴장이 만들어진다. 전시 제목이 어떤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깨달음 역시 새로운 발견으로 옮겨간다. 연극적 장치인 방백 Aside는 말의 전달에서 완전한 우회가 약속되었을 때 무대 위에서 효과적으로 작동된다. 걷기 Walking에는 몸의 이동뿐만 아니라 시각의 움직임이 포함되어 있다. 사실 모델링 과정에서 물리적 무게의 이동과 재배열로 말미암은 동적 효과가 여타 글로 제시되는 단서들 없이도 관객에게 닿을지는 회의적이다. 그러나 다분히 연극적인 연출과 곳곳에 삽입된 무중력, 초현실적 빠른 붓질이 보는 이의 눈 근육을 쭉 뻗거나 에두르게 하면서 자극하기에 그것으로 또 충분하지 않나 싶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이전 시리즈들과 신작들 사이에 드러나는 배경의 변화에 대해서 덧붙이고자 한다. 공간에 깊이를 상정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배경이 화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도시에서 느끼는 불가해한 감정을 건축물 혹은 그것의 잔해에 투사한 지난 작업들에서 배경은 대부분 매끄럽게 삭제되어 있거나 중심 도상과 변별점을 갖고 있었다. 신작에서 배경이 중심 사물들과 유사성을 갖추게 되면서 일종의 소격효과가 떨어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작가가 주목하고자 한 무엇의 파편 내지는 미결정의 면과 선과 덩어리가 발생시키는 어떤 사유들이 내부에서도 좀 더 큰 파동으로 진자운동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보는 이로 하여금 보다 조심스럽고 자연스럽게 그 리듬 안으로 들어가도록 끌어들이고 있다.




글. 신지이 (아트 스페이스 풀 큐레이터)
월간미술 2020.02월호 

ⓒ2024. Rho Eunjoo.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