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와 0시 사이의 목소리들
새해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현장 소리가 들린다. 12월 31일. 소음 사이로 사람들이 1월 1일을 기다리며 함께 숫자를 센 다. 들뜬 목소리들이 간격을 두고 한 곳을 향해 울린다.
“오- 사 사- 삼! 이- 이 일- 일!”
여기저기 퍼진 목소리들은 아주 잠시 환호성으로 모인다. 하지만 찰나의 함성은 현재의 순간이 역사가 되는 목적 지향적 시간을 유보하는 것 같다. 마지막 숫자를 내뱉는 순간의 부푼 목소리들이 금새 흩어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동의 미래 대신에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새로운 현재를 가다듬는 각자의 틈을 떠올리게 한다. 도래할 다음을 함께 세지만, 각자의 목소리는 12월 31일과 1월 1일이 포개진 0시 0분을 통과하며 다르게 발화된다. 이 시간을 스치면서 어제를 환기하지도, 내일을 기대하지도 않는 각기 다른 태도는 밤의 공기를 정교하게 메운다. 전시《귀거나 꼬리》는 그날 밤을 걷는 사람들이 내는 서로 다른 목소리 같다. 나도 그 틈에서 12월 31일과 1월 1일을 여닫는 목소리들을 듣는다.
무거운 철문을 연다. 입구에 놓인 오디오와 이어폰을 든다. 모니터에 구두를 신은 사람의 발걸음이 재생되고, 질량이 작아 보이는 무채색의 사물과 그림들이 바닥과 벽 곳곳에 견고하게 놓여있다. 한 쪽 방에서는 흑백의 기하학 그래픽 영상이 반복된다. 계단의 벽면을 따라 사물이 설치되어 있다. 작은 연필 드로잉도 보인다. 계단 끝에 선다. 층고가 높은 전 시장의 전경이 보인다. 입구의 벤치로 돌아와 숨을 고른다. 이제 이어폰을 꽂고 오디오의 재생버튼을 누른다.
Bee-p. 단호한 기계음. 시작을 알린다. 곧이어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제목을 무겁고 딱딱하게 말한다. 그 목소리를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공간을 다시 둘러본다. 사물과 사물 사이를 조심스럽게 걷는다. 아직까지 보는 감각과 듣는 감각이 연동되지 않는다. 사물의 이미지를 이해하는 동안에는 낭독을 따라가기 어렵다. 그 탓에 목소리는 배경음이 된다. 소리를 잠시 흘리며, 사물의 표면을 천천히 살펴본다. 섬세하게 다듬어진 나무, 모래, 고무의 질감이 바닥에 얕게 깔려 있거나, 물감이 벽의 균열과 얼룩 위로 가볍게 발라져 있다. 이런 상태가 공간에 스며 들어 사물과 사물을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 구절 같다. 발신인과 수신인을 구별하기 어렵지만 오랜 시간 서신을 교환한 것 같은 사려 깊은 관계로 보인다. 서서히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작은 방에 혼자 앉는다. 자세를 낮추고 목소리에 집중한다. 고요한 어둠을 종횡으로 가르며 움직이는 하얀 빛줄기를 바라보며 어딘가로 침잠한다.
“그렇게 당신의 품에 안기어 숨막히게 긴 문장을 내뱉고
싶었다.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고 뱅글뱅글 당신 곁을 맴돌아, 세상의
기운을 온통 빨아들이는 소용돌이가 되어 매운 가슴으로 당신을 끌어안고 싶었다.”
다시 걷는다. 바닥에는 묵직해보이는 검은색 도면과 그 옆으로 곧 바스러질 것 같은 모래구슬들이 흩어져 있다. 손님의 손님. 그러고 보니 일련의 제목들이 기다림이나 대기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전해지지 않고 되돌아오거나, 누군가를 만 날 준비를 하거나, 떠나지 못하고 망설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닫힌 문이 언젠가 열리리라 기대하며 서성이다가 도로 앉는 장면이다. 결정적인 행동을 유보하며 다음 장면을 기다린다. 약속시간을 지연시키며 기다리는 상태를 지속시키는 모습에서 사물의 긴장을 엿본다. 함께 숫자를 세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카운트 다운. 시간과 촉각을 공유하는 목 소리다.
“해피 뉴 이어!”
나는 속으로 숫자를 따라 센다. 그들의 짜릿함을 공유한다. 무심코 고개를 든다. 벽에 그려진 사물의 조각들이 뱅뱅 맴 돌아 어딘가를 비추는 상태를 본다. 그리고 여러 대의 모형 비행기 날개가 하나로 이어져 휜 척추처럼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는 걸 발견한다. 앉고 싶다. 저 멀리 계단에 앉기로 한다. 열 두개의 다리와 한 개의 꼬리를 가진 의자를 지나쳐 걷는다. 오디오에 따라 장면이 전환되는 것을 느낀다. 배경음의 역할에서 공간의 전면으로 나서고, 점차 보고 듣는 단순 감각에서 이미지와 낭독을 조합하는 감각으로 변한다. 사물은 곧 대본이 되고, 공간은 무대가 된다. 그리고 목소리는 대사가 된다. 대사는 목소리를 지지체 삼아 또렷한 발음으로 행간을 담는다. 따라서 이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이미지와 언어가 교환하는 운율과 리듬을 찾아가는 산책이다. 함축과 상징을 생각하기보다 눈 앞에 펼쳐진 사물과 사물의 흐름을 읽어간다. 공간에 배치된 사물(이미지)들은 움직임의 방향에 따라 명사, 동사, 형용사가 되어 새로운 문장을 써내려 간다. 걷는 속도, 서 있는 위치 그리고 머무는 시간에 따라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낸다. 어느덧 계단 끝에 앉아 무 대가 된 전경을 본다. 뒤를 돌아보면 요동치는 덩어리를 밧줄로 동여맨 한 쌍의 몸체 드로잉이 있다.
“니나와 코스타가 만나고 사랑하고 떠나고 버림받고. 개체들의 삶은 빛 속에서 이루어진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이제 집으로 간다. 쿵쿵쿵. 무언가가 구르는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눈 앞의 모래 구슬은 움직이 지 않는다. 문을 열고 나서니 해가 지고 있다. 트랙은 여전히 재생된다. 좁은 골목을 지나 대로변으로 나간다. 시야가 탁 트인다. 외부 소음이 고요해지고, 낭독이 선명하게 들린다. 되려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넓은 8차선 도로에 차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하도를 지나 전철역으로 간다. 목소리 뒤편의 공간음이 달라진다. 목소리는 걷고 있는 몸을 주변과 분리한다. 걷는 속도, 공간 소음, 스치는 사람들과 냄새는 이야기의 구두점이 된다. 낭독은 현재 마주한 상황과 교류하며 전시장에서 본 이미지를 불현듯 불러 온다. 목소리와 현재 상황 그리고 기억이 정반합을 통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아, 지금만
같으면 모든 것이 좋다는 생각에 깊은 숨을 들이키게 했지. 가슴 저편까지 스며드는 공기입자에 머리 끝이
주삣주삣 하네. 또한 공기입자를 무심히 관통하는 햇빛이 내 안구를 뚫고 들어올 때 현실이 된다.”
퇴근시간 지하철을 타게 된 탓에 군중 사이에서 낭독에 몰입한다. 눈 앞에 수 많은 신발들이 멈춰 있다. 원하는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 영원히 치우치지 않을 구두 위의 균형추를 본다. 이제는 사물도 관람자도 움직인다. 움직임을 통해서 계속 달라지는 맥락이 실시간으로 재생된다.
“으스스한 것은 부재의 오류, 혹은 존재의 오류로 구성된다. 으스스한 감각은 아무 것도 없어야
하는 장소에 무언가 존재할 때, 혹은 무언가 있어야만 할 때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귀거나 꼬리는 시작과 끝을 가늠하게 한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얼굴 없는 귀와 어둠 속에 몸통을 감춘 꼬리의 움직임 을 상상한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대상이 되어 통과하는 것과 동시에 더불어 교류하며, 잊혀지거나 누락된 시간들을 소환하며 협업한다. 따라서 감상의 과정은 직선적 서사 보다는, 개별 상황에 따라 이미지와 목소리가 재의미화되는 비직선적 서사를 지향한다. 어느새 거리가 깜깜하다.
Bee-p. 단호한 기계음. 끝을 알린다. 그리고 남자의 어색한 목소리가 들린다. 이번엔 최선을 다해서 고백한다.
“아 이토록 아름다운 인간이여, 나의 두려움과 나의 용기와
나의 힘겨운 무게를 지탱해줄 발바닥을 내게도 다오. 내게도 다오. 내게도 다오.”
나의 힘겨운 무게를 지탱해줄 발바닥을 내게도 다오. 내게도 다오. 내게도 다오.”
글. 이소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