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아크로바틱: <귀거나 꼬리> 감상문


세심하게 제작된 작품들이 공간을 수놓고 있었다. 부연하자면, 어떤 작품은 놓여있었고, 어떤 작품은 붙박여있었고, 어떤 작품은 널브러져있었고, 어떤 작품은 나풀거리고있었고, 어떤 작품은 떨궈져있었고, 어떤 작품은 얹혀있었고, 어떤 작품은 고여있었다. 각 작품이 놓인 태(態)가 가지각색이라 느껴졌다는 말이다. 가지각색이라 하지만 설치의 인상이 분방하거나 무질서하다는 의미는 아니고, 오히려 뭐랄까. 개별 작품들이 필요로 하는 물리적/심리적 거리감을 확보하는 한에서 가능한 한 리드미컬하게 안배된 공간 운용이 전시 전반을 조율하고 있다는 인상에 가까웠다. 크게 부대끼거나 자신을 강요하지 않는 선에서 작품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 속삭임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고, 마치 무균질의 샬레에서 배양된 정체불명의 세포질들을 조심스레 열람하듯, 마스크와 위생장갑을 낀 채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각 작품들의 양태를 관찰하게 되는 것이었다.


숨죽인 감상 끝에 나는 나 나름 적합하다고 느낀 위치[1]에 주저앉아 홀로 상상했다. ‘이 작품들은 어둠 속에 놓여있다’고. 그러니 칠흑같은 어둠 속에 놓인 인간이 본능적으로 그리 행동하듯, 이 작품들은 빛에 의존해 무언가를 ‘보여주기’보다는 스스로의 신체-그러니까, ‘작품’이라 명명된 사물의 몸-이 관장하는 다양한 감각들에 의존한 채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공간에 기거하고 있다는 식의 우화적인 상상. 그러한 상상 속에서 나는 기묘한 입장에 놓이고 말았는데, 그 입장은, 다음과 같은 두 명제로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a. 저들은 어둠 속에 있으나 나는 속에 있다.
     b. 그러나 나는 저들을 보지 못한다.

빛 속의 인간은 결국 ‘시각’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보의 우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어서, 나는 저들의 존재양식[2]을 장님 코끼리 만지듯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전시가 특정한 개념적/조형적/서사적 맥락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방도가 없는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스스로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데에 골몰하고 있었다. 한발 더 나아가, 저들이 나의 존재에 대해서조차 무관심할지도 모른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3] 오히려 빛을 매개로 저들을 부감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 존재가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뚤린 눈으로 아무리 저들을 샅샅이 훑어봤댔자 내가 과연 저들을 만나기나 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저들의 조건인 ‘어둠’이 거꾸로 나를 잠식해 들어온다. 나는 저들의 일원, 그러니까 어둠 속에서 홀로 사부작대는 한 점 사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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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감상을 관장한 두 가지 절묘한 요인이 있다.
첫 번째는 전시를 소개하거나 부연하는 일체의 정보가 없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작품 전시’는 철저하게 제도화된 사건에 가깝다. 결국 ‘전시’를 이루는 관계항들을 다루는 방식이 관습화되어있다는 말인데, 대표적인 관습으로는 ‘큐레이팅’이 있다. ‘큐레이팅’은, 통념적으로는 ‘[예술 작품]이라는 수수께끼를 매끄럽게 관객에게 매개하는 역할’을 이른다. 관객들이 어떤 불가해(不可解)를 대면하며 겪는 충격을 완화하는 것이다. 그 완충 장치가 바로 ‘전시 소개글’이나 ‘작품 설명글’, 혹은 ‘도슨트 프로그램’ 등의, 주로 언어를 매체로 생산된 2차 컨텐츠들이다. <귀거나 꼬리> 전시의 경우, 작품은 그 어떤 매개변수나 완충 없이 바로 관객에게 부딪혀 온다. 기성의 전시 관습에 익숙한 관객일수록 이러한 조건을 더욱 당혹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4]큐레이팅의 언어는 어둠을 살라먹는 빛이기에, <귀거나 꼬리>로부터 추방당했다.

두 번째는, 한 술 더 떠서, 작품을 의미를 규명하는 언어가 아닌 작품의 수수께끼를 다변화하는 언어를 오디오 텍스트로 제공한 점이다. 큐레이터나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메시지가 아닌, 제3의 필자들을 섭외하여 생산한 이 텍스트들은 개별 작품들의 의미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담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어둠 속에서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 텍스트들은 작품을 포괄하는 ‘공간’적 맥락 위에 ‘시간’적 맥락이라는 수수께끼의 레이어를 한 겹 덧씌우는데, 전시 관람의 듀레이션duration을 강요하는 이 장치[5]를 통해 전시장은 개념적이라기보다는 총체적인 연극의 시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관객과 작품이 <귀거나 꼬리>라는 미술극에 동원된 미장센-혹은 배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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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일반적인 전시 구성의 관습을 떠나서 자신들의 작품만이 오롯이 실존할 수 있는 조건들을 자아내려는 작가들의 몸부림 같은 것이 느껴졌던 부분이다. 그 몸부림이 얼마만큼의 성취를 이루었고 얼마만큼의 미학적 비젼vision을 제공하는지의 문제는 사실 내게는 부차적이다. 창작자들은 각자 자신의 전선(戰線)에서 스스로의 목적을 설정하고 투쟁해 나가면 된다.[6]그런 관점에서, 이 전시에서는 어딘가 비장한 지점이 느껴지기도 했다.


팀 투웨이채널이 어떤 과정을 통해 <귀거나 꼬리>를 도출해 냈는지, 그리고 앞으로 또 다른 활동을 계속해 나갈지에 대해서 나는 알 수가 없지만, 혹여 프로젝트를 차후에 더 진행하게 된다면 기대하게 되는 부분들은 있다.

첫 번째, 관람의 ‘시간’을 다루는 부분에 있어서 조금 더 정교하게 접근하기를 기대한다. 오브제, 영상물, 그림 등 개별적인 ‘작품’에서 엿보이는 집요함과 집중력이, 관람시간을 제어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일곱 편의 오디오 텍스트 각각의 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성취에 있어 편차가 있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각 텍스트들은 다들 나름대로의 맥락 하에서의 흥미로운 지점들을 갖고 있었다. 짚고 싶은 부분은 러닝타임에 대한 것이다. 총 한 시간여에 달하는 오디오 텍스트는 <귀거나 꼬리> 전시장에 놓인 작품들을 관람하는 데에 필요한 적정 시간을 아득하게 상회하는 분량이어서, 대략 5번 트랙부터는 전시공간이나 거기 놓인 작품들에서 완전히 유리된 채 오디오 혼자 독백을 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작가 분들에 대한 애정이나 전시 관람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있는 관객이 아니라면, 끝까지 청취하기 힘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관람객 당 한 개씩 제공된 이 오디오가 각자 들을 만큼 듣고 꺼도 상관없는 장치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련번호가 붙어 있는 일곱 개의 트랙은 여섯 번의 분절을 포함하여 꽉 짜인 ‘순서’가 잡힌 구성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트랙들을 모두 소화할 만큼의 전시 규모를 확보하던지, 아쉽더라도 오디오 텍스트의 분량을 줄이는 판단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두 번째, 자신들의 작품이 갖고 있는 고유한 특질을 더 명백히 인지하고 개발하기를 기대한다. 개별 작품들의 세부를 결정짓는 감각의 측면에 있어서는 미니멀 취향이, 작품 관람의 조건을 제어하는 측면에 있어서는 연극적인 맥락이 눈에 띄는데, 자칫 잘못하면 마이클 프리드가 1960년대 말 미니멀리즘을 규정한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다.[7]물론 내 눈에 <귀거나 꼬리>가 그리 보이지는 않았다. 물성과 개념성이 중심의 본토 미니멀리즘과는 대조적으로 서정성과 문학성이 강조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인데, 이런 감상도 한 번의 전시를 보고 느낀 단편적인 인상일 뿐이다. 결국 자신의 작업이 갖고 있는 어떤 고유한 특질을 어떻게 개발해 나갈 것인지는 작가 본인들의 몫이다. 자신의 전선(戰線)을 더욱 첨예하게 날 세우기를 기대한다.


글. 김동규 (작가)


[1] 정확하게는, 철제 계단 네다섯 번째 칸 정도의 지점

[2]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이 저들의 존재양식인지, 존재이유인지, 존재가치인지조차 불명확하다

[3] 예를 들면, 3차원적 존재는 2차원의 구조를 관찰할 수 있으나 2차원적 존재는 3차원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4] 어찌보면 이러한 당혹감은, ‘미술전시’에 익숙치 않은 비전공자들이 전시장에 발을 들여놓으며 느끼는 긴장감이나 발가벗겨진 느낌과 유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5] 그것은 영화나 연극의 러닝타임만큼 절대적이지는 않으나 일반적인 전시 관습에 비해서는 굉장히 강제적이다.

[6] 지극히 개인적으로는, 오디오 텍스트, <고백>이 이 전선에 서서 낭독한 오만하고도 아름다운 선언문처럼 들리기도 했다

[7] 그런 거 상관없다는 식으로 창작활동을 해 나갈 수도 있겠지만, <귀거나 꼬리>가 겨냥하는 것처럼 보이는, 혹은 얼떨결에 얹히게 된 scene은 명백히 전공자 중심의 컨템포러리 미술판이다. 물론 저 빌어먹을 미술사로부터 자유로워질 방법이 없지는 않다. 극도로 로컬해지면 된다. 고속도로 휴게실의 상화 판매부스는 가장 로컬한 형태의 대표적인 미술scene이다. 비하의 의도는 전혀 없다. 요는, 내가 발 디딘 땅의 정체를 규명하는 과정이, ‘창작’이라는 가장 내밀하고 순수한 활동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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