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의 면과 선과 덩어리
언젠가 검색하다가 우연히 찾게 된 시구절을 (정확히는 시를 포스팅한 블로그 주소를) 작가에게 보낸 적이 있었다. ‘중간의 상태’를 하나의 장면이자 형태로 보여주고 싶다는 작가의 말을 들은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구절들이 김정란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에 실린 것임을 뒤늦게 확인해 전문을 읽어 보았고, 당시에 전했던 것을 다시 나누고 싶어 옮겨왔다.
새벽? 오후? 덜 세계와 세계의 사이. 세계와 덜 세계의 사이. 여자들이 왔다. 얼굴이 없는 여자들. 검은 옷을 입고 흰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여자들. 그녀들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그 나무를 둘러쌌다. 서넛? 열두엇? 연두색 나뭇잎들 사이로, 낮은, 분명함의 독성이 빠진, 자기 확신을 버린, 모호한 태양이 흔들렸다. [1]
김정란, 연두색 잎사귀들과 낮은 태양 中
‘사이’의 징표들
태양이 높게 떠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하다. 밤은 밤대로 틈을 주지 않는 가득 찬 어둠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낮과 밤 사이는 시인의 언어로 “분명함의 독성이 빠진”, “고정된 존재가 될 틈이 없는”[2] 모호한 것들이 주목 받는 시간이다. 덜 세계와 세계의 사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서 나는 노은주의 작품들이 간직하고 있는 시간성을 떠올렸다. 작가는 줄곧 유사한 톤의 색 배합으로 화면을 채워 오고 있는데,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Blue Window⟫전에서는 푸른 주조의 연작들을 소개했다. 프랑스어 표현 중에 푸른 시간을 뜻하는 뢰르 블루(l'heure bleue)는 낮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어스름 혹은 해가 막 뜨기 시작한 새벽녘을 가리킨다. 다소 직접적이라 느껴지는 색이 근거의 전부는 아니고, 작가가 주로 소재로 선택한 사물들이 전하는 정서가 예의 그 시간성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고 여겨졌다. 시인이 불러낸 여성들에게 얼굴이 없듯, 노은주의 형상들 역시 정체성이 모호한 것 투성이다. 이번에도 구부러진 철사, 부서진 나뭇조각, 엉겨있는 점토, 실 가닥, 흘러내린 석고와 같이 기능이나 역할로 보자면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사물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딱딱하고, 물렁하고, 얇고, 두껍고, 짙고, 밝은
세 개의 작은 캔버스에 그려진 <Still Life>는 전시장 초입에 걸려있어 전시의 프롤로그(prologue)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듯하게 분할된 배경 앞으로 마디가 꺾인 막대와 곡선을 그리는 실 가닥이 놓여있다. 자세히 보면 이 세 개의 틀은 동일한 상을 연속하여 그린 것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시선 또는 몸이 오른쪽으로 조금씩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Arrangement> 연작은 전통적인 정물화처럼 보인다. 손으로 꾹꾹 눌러 조형한 듯한 질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화병에 작가가 자주 소재로 선택하고 있는 것들이 어지럽게 꽂혀있다. 그리고 공통으로 벽에 푸른색 면이 걸려있다. <창문이 있는 풍경 Blue Window Scene>은 제목을 통해 벽에 그려진 푸른 면이 창문임을 지시한다. 이곳에는 명명이 어려워, 딱딱하고, 물렁하고, 얇고, 두껍고, 짙고, 밝은, 어떤 ‘차이’들로 인식되는 사물들이 모서리에 세워져 있다. <걷는 형태 Walking Object> 역시 질감으로 언어화할 수 있는 것들이 그려졌으며, 그 너머로 거울이 보다 분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삼단화로 구성된 <푸른 그림자 Blue Shadow> 연작도 <Still Life>와 같이 동일한 대상을 공유하며 오른쪽으로 곡선을 그리는 시선/몸의 이동이 포착된다. 캔버스 중앙을 보면 구부러진 철사에 납작한 점토 조각이 가득 붙어있어 고꾸라질 듯 위태로워 보이고, 뒤에 놓인 거울 역시 사물과 허공을 번갈아 비추며 시선의 움직임을 전달한다. 그리고 비스듬하게 공간을 나누며 세워져 있는 벽은 보는 이의 시선을 안쪽 깊숙한 곳까지 닿게 한다.
기대어, 서서, 흐르고, 조직하는
앞선 작품들이 질감의 차이와 시선의 이동을 보여준다면, 다음은 상태의 변화에 좀 더 집중한 회화들이다. <Dropping> 연작은 좁은 구멍을 통해 점성이 있는 석고가 쏟아져 내리는 움직임을 그렸다. 더불어 흐르는 액체가 고체로 굳어버린 상태의 변화도 시사한다. <어느 장면 Between Night and Dawn> 연작은 기대어, 서서, 흐르고 있는 부서진 조각들 위로 빛이 강하게 투사되고 있다. 공간에 유입된 빛은 사물의 표면을 강조하고, 위계를 만든다. 그림자로 인해 존재감이 증폭되고 질감은 더욱 과장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Twilit Space>에는 유일하게 붉은 빛이 스며들었다. 중앙에 걸린 둥근 거울은 앞에 놓인 구겨진 철사를 비추고 또 빛을 반사해 공간을 아름답고 기이하게 조직한다. 공통적으로 모든 작품들에는 평면에 깊이를 만들어 내는 장치들이 그려져 있다. 창문은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외부로 보내고, 거울과 벽은 내부의 깊이를 조정하며 시선을 연장시킨다. 더불어 배경이 되어 앞의 형상을 ‘낳는’ 상생관계로 작동하며, 부분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을 서로 엮어주는 역할도 함께 수행한다.
몸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는 그의 저서『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에서 “애매모호한 것과 명제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 우리를 이미 언급된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다” [3]고 적는다. 무엇의 부분과 마주했을 때 과거의 완전했던 모습을 상상하는 습관을 버리면 모호함은 해결해야 할 과제로 작동하지 않는다. 더불어 그들에게 당위나 이치를 묻지 않는다면 우리를 전에는 본 적 없는 지점으로 이끌어 준다. 그렇다면 애당초 작가에게 선택된 사물들이 실재하는 것의 일부이자 잔해들인 까닭은 뭘까? 아니, 그보다도 실재하는 것으로 볼 여지는 어디에 있나? 이전에도 작가의 작업에 대해서 짧은 글로 두 번 정리할 기회가 있었는데 두 편에서 모두 언급하면서도 동시에 간과했던 지점이 있었다. 처음 정리할 때는 드로잉과 모델링 과정을 거쳐 회화로 옮기는 작가의 작업 방식이 궁극적으로 최종 화면에 어떠한 흔적을 남기는지 보이지 않는다고 의심했다가 다음의 시도에서는 작업 과정에서 멈췄다.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다른 세계는 초월적인 공간과 시간성에 둘러싸인 곳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회화는 비가시적인 존재를 가시화하는 표현 방식으로, 몸의 움직임은 대상에 대한 지각을 가능하게 하고, 더 나아가 몸의 지향성은 “대상이 역사 속에서 변해가는 의미를 기술하는”[4] 역할을 한다. 노은주 역시 어떤 초현실적인 풍경 또는 사유를 다루고자 했다면 상황을 연출한 조건들이 삭제 편집된 화면을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화면 안에 바닥과 벽을 세우고, 거울과 창문을 걸고, 빛으로 그림자를 만들어 공간의 개연성과 맥락을 드러냈다. 이는 눈으로 지각하고 손으로 체득하며 몸을 통해 이해한 것들이라는 단서로 최종 화면에 제시된다. 시간, 상태와 질감, 움직임과 변화, 깊이, 관계라는 추상적인 영역에 대한 이해가 몸의 가능성과 한계로부터 발현되었다는 사실은 노은주의 회화를 이해하는데(혹은 감상하는데) 꽤 유효하게 작용한다.
<Still Life>를 제외하고 모든 작품은 대형 회화라고 불릴 만큼 크기가 크다. 무엇인가 크거나 작다고 지각하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으로, 관계되어있는 대상과의 차이를 인지하는 것이다. 딱딱함은 물렁함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으며, 두꺼운 것은 얇은 것 옆에서 추상적 부피를 언어화할 수 있다. 그래서 캔버스가 크다고 느끼는 것은 캔버스를 마주한 나의 몸의 크기를 동시에 감각하는 일이다. 최종적으로 회회가 관객의 신체까지 물리적으로 포섭하는 순간이다. 노은주는 서로 다른 성질과 질감을 가진 사물들의 집합, 상대적 감각, 사물의 운동성과 몸의 움직임, 투과와 반사를 통해 대상에 집중하게 한다. 기능과 역할, 쓰임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바깥의 질서가 무용해지게 내부에서 신체적으로 감각하게 하는 하나의 훈련의 장으로써 대상의 형질을 이미지로 재현하는 것이다. 사물을 부단히 신체성의 영역, 분명함의 독성이 빠진 다른 세계로 돌려 보내는 일.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라는 주제는 회화의 역사만큼 오랫동안 화가들에게 다루어져 왔으며 그만큼 도달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과제이다. 그렇기에 이 글이 작가의 매력적인 시도 옆에서 회화가 구성한 의미망 사이를 열어내는 미진하지만 돈독한 시도로 읽히길 바란다.
글. 신지이(독립기획자)
[1] 김정란, 『그 여자, 입구에서 뒤돌아 보네』, 169-170, (서울: ㈜도서출판 세계사, 1997)
[2] 같은 책, 169.
[3] 모리스 메를로 퐁티,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김화자 역, 99p, (서울: 책세상, 2008)
[4] 같은 책, 124.